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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빛의 건축가, 루이스 칸이 남긴 이야기(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유작(遺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첫 번째는
어느 한 위대한 건축가의 마지막 흔적을 더듬어본다. 


‘침묵과 빛’의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이 그 주인공이다. 


1901년 에스토니아에서 가난한 유태인 아들로 태어난 루이스 칸은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듣게 되는 이름들, 즉 거장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세계적 건축가 중 한 명이다. 


칸은 그가 활동하던 시대의 흐름이었던 국제주의 양식과는 거리를 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건축가로 당시 건축가들이 가졌던 하나의 고민, 바로 현대건축의 기틀을 마련한 4대 건축거장(르 꼬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 로에, 알바 알토)의 그늘을 벗어나는 문제에 있어 가장 독보적인 행보를 걸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대표적 건축물들을 50세가 넘어서야 선보였던 대기만성형 건축가로도 알려져 있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스스로도 보지 못한 필생의 역작,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보통 칸의 건축은 ‘침묵과 빛’으로 이야기된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건축물에 닿기 전에 빛은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라는 그의 말처럼 건축은 빛을 진짜 빛으로 만드는 작업이라는 칸의 철학을 대변하는 뜻이다. 즉 그의 건축은 빛이 존재해야 완성되는 것이었고, 이는 예일대 예술 전시장(Yale University Art Gallery), 요나스 소크 연구소, 킴벨 예술 전시관(Kimbell Art Museum),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National Assembly of Bangladesh) 등 건축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들로 보여졌다.
그의 많은 작품들 중 이제 살펴볼 것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으로 이 건물은 1974년 73세의 나이로 뉴욕 펜실베니아 기차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루이스 칸이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의 건립은 1959년 처음 결정되었다.
당시만해도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파키스탄의 하나의 주(州)로 속해있었고, 한창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때였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샹사드 바반에 의사당 건립을 짓기로 하고 설계를 의뢰한 사람은 처음에는 루이스 칸이 아니었다. 방글라데시 건축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무즈하를 이슬람(Muzharul Islam)이었다. 이슬람은 칸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그가 의사당 건물이 자국의 미래 세대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길 바라는 뜻에서 스승인 칸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은 의사당 프로젝트에서 칸을 보조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지금에서 보면 세계적인 건축유산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건물을 보기 위해 방글라데시를 찾으니 이슬람이 원하던 바는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칸의 의사당 마스터플랜은 1962년 완성되었고, 1964년 1,500만달러의 초기 예산으로 공사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 건물인 의사당을 포함, 광장, 호텔, 가든, 주거시설, 호수 등 전체 규모가 200에이커(약 81만㎡)에 달하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시작되자마자 반대여론에 시달려야 했다.
그 이유는 당시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지나치게 규모가 큰 건설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공사비가 1억 2,800만 달러까지 치솟았고, 완공된 후 시설 유지비용이 연간 5,500만 달러에 달했으니 비판적 여론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그것도 경제개발이 한참 뒤쳐진 가난한 나라에서라면 기념비적 건축물이 그들에게는 큰 의미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의사당이 지역문화에 기반한 민주주의의 상징이 될 것이라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지속적인 설득과 완성도 높은 건축물을 짓기 위한 수많은 연구와 노력이 없었더라면 국회의사당 프로젝트는 진작 무산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대 여론은 잠잠해졌을지 몰라도 공사는 그다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1971년 방글라데시(당시 동파키스탄)가 독립을 위한 전쟁에 휘말리며, 공사가 전면 중단된 것이다. 이후 독립한 방글라데시 정부는 1974년 초기 계획에서 수정된 마스터플랜으로 공사를 다시 시작했고, 1983년에 이르러서야 국회의사당 프로젝트는 완성될 수 있었다. 결국 루이스 칸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완성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의 모습을 살며시 들여다보자면 우선 육중한 콘크리트의 무게감이 단번에 느껴지는 기념비적인 외관이 가장 큰 특징으로 다가온다.
대리석으로 채워진 줄무늬가 인상적인 이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총 9개로 팔각형의 구성으로 펼쳐지는데, 각각의 덩어리는 원, 사각형, 삼각형 등 기본적인 도형의 형태와 표현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보여지는 단순한 기하학에서 오는 평면과 입면은 칸의 건축을 말하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고전주의에 정통한 보자르식 건축을 공부하고, 유럽에서 고전건축을 연구하며 당시 유행했던 국제주의 양식보다는 전통 그리스, 로마 건축 같은 전통건축에 더 관심을 보였던 건축가였다.
그래서인지 인공호수 위에 떠있는 의사당 건물은 마치 고대 유적의 모습처럼 장엄하고 엄숙한 자태로 드러난다.
또한 빛에 정통한 건축가답게 건물들의 모양은 서로 다르지만 공간과 공간이 절묘한 조합을 이루며 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창을 대신하기에도 충분하다.
 

빈곤의 나라이자 행복한 나라(2009년 행복지수 1위)라는 아이러니한 곳, 방글라데시. 가난함 속에서도 웃고 있는 이곳 사람들에게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은 화폐에 새겨 넣을 정도로 자랑스러워 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건축과 관련이 없는 여행객들이라도 방글라데시에 오면 꼭 한번 찾는 장소이기도 하며, 20세기 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위대한 건축유산은 침묵과 빛의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의 유작이자 필생의 역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들이 찾았던 그의 흔적, 또 하나의 유작으로 이어지다 

앞서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을 루이스 칸의 마지막 작품으로 소개했는데, 최근 뉴욕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포 프리덤스 파크(Franklin D. Roosevelt Four Freedoms Park)’가 완공됐다는 소식과 함께 마지막이라는 타이틀은 이 공원에 물려줘야 했다.
지난 10월 24일 개장한 포 프리덤스 파크 또한 루이스 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세계 2차대전이 일어났던 시기에 미국을 이끈 미국 제 32대 대통령으로 포 프리덤스 파크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공원의 이름인 ‘포 프리덤스’는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유명한 연설을 말하는 것으로 언론과 발표의 자유, 신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루이스 칸이 포 프리덤스 파크를 설계한 것은 1973년이다.
즉 설계한지 40년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셈인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있다.
지난 2003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My Architect”가 포 프리덤스 파크 재건설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 이 영화는 루이스 칸의 아들인 나다니엘 칸(Nathaniel Kahn)이 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해가는 내용으로 이를 본 반덴 휴벨(Vanden Heuvel) 루스벨트 재단 이사장이 2005년 공원의 건설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포 프리덤스 파크는 1974년 급격히 악화된 뉴욕시의 재정문제로 건설이 포기된 상태였다.
 

프로젝트 재추진 확정 후, 시카고의 알파우드 재단(Alphawood Foundation)은 즉각 지원금을 조성했고, 뉴욕시와 뉴욕주, 그리고 각계각층의 개인 기부금도 이어져 1974년과 같은 재정부족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2010년 재개된 포 프리덤스 파크 건설 프로젝트의 진행은 뉴욕의 세계적인 건축회사 ‘Mitchell/ Giurgola Architects’가 맡았고, 그들은 옐로우 트래싱 페이퍼 위에 목탄으로 스케치되어있던 칸의 드로잉을 최대한 원형 그대로 살려내려 노력했다.
참고로 목탄 스케치는 칸의 건축 드로잉 특징이라 말할 수 있는데, 그는 어릴 때 가난으로 연필 살 돈이 없어 잔 나뭇가지를 태운 목탄 막대로 그림을 그려 돈을 벌기도 했다.
 


포 프리덤스 파크는 뉴욕 이스트 리버(East River)의 작은 섬 루스벨트 아일랜드(Roosevelt Island)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다.
이곳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자면, 공원은 먼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장엄한 분위기의 계단으로 시작된다.
계단에 올라서면 린덴(linden)나무들이 대칭으로 늘어서있는 하향 경사로의 잔디밭이 열리고, 그곳을 거닐면 뉴욕의 고층건물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시민들을 위한 산책로처럼 조성된 잔디밭 광장은 공원 맨 끝에 보이는 루스벨트 흉상으로 수렴되며 끝이 난다.
루스벨트 흉상은 아티스트 조 데이비슨(Jo Davidson)의 1933년 작품으로 이 역시 루이스 칸의 선택으로 공원에 놓이게 된 것이다.
흉상을 뒤로하면 대리석의 벽들이 작은 광장을 만들어내는 데, 이 모습은 마치 고대 그리스 사원을 가져다 놓은 듯한 근엄한 장면으로 펼쳐진다. 칸의 기념비적 건축 특성이 이 곳에서도 어김없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포 프리덤스 파크처럼 40여년전의 디자인이 별다른 수정 없이 다시 완성되는 것은 건축사를 통틀어서도 흔치 않았던 일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건축을 찾아 다니며 그에 대해 알아가려 했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이 제작한 영화를 통해 잊혀졌던 칸의 유작을 다시 살려내고자 노력한 후세의 사람들.
그들로 인해 위대한 건축가의 위대한 건축물은 다시 살아 숨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출 : http://magazine.jung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