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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혁명이 낳은 나라, 방글라데시

[유라시아 견문] 대분할 ⑤ : 방글라데시
벵골 르네상스

병한 역사학자


다카 공항의 출구를 나오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열기와 습기가 동시에 덮쳐온다.

40도 더위는 이미 익숙해졌다. 30도만 되어도 청량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북인도 내륙부의 그 타는 듯한 더위가 아니었다. 푹푹 찌는 찜통 더위다. 괴롭기로는 후자가 훨씬 더하다. 매번 새 도시에 가면 하염없이 마냥 걸어 다니는 습관이 있다. 사전 정보 없이, 선입견 없이, 그곳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보는 의례이다. 부러 저녁나절에 서너 시간을 걸었는데도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깔끔한 성격이 아님에도 두세 차례 씩 속옷과 티셔츠를 갈아입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건조하여 머리칼까지 빳빳해지던 펀자브와는 자연환경부터 판이하게 달랐다. 

방글라데시는 '벵골인의 나라'라는 뜻이다. 터전은 벵골 델타이다. 히말라야와 벵골 만을 잇는 곳에 자리한다. 갠지스 강도 지나간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데다가, 하늘에서는 비도 많이 내린다. 봄에는 히말라야의 설산이 녹아 강물이 불어나고, 여름이면 몬순의 영향으로 남쪽에서 먹구름이 밀려와 장대비를 쏟아 붓는다. 24시간 동안 1미터의 비가 내린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강물과 바닷물이 뒤섞여 대지를 뒤덮는 경우도 있다. 홍수가 일면 영토의 70%가 물에 잠기기도 한다. 눈물과 빗물, 강물과 바닷물, 방글라데시는 단연 물이 만든 나라이다.

풍부한 수량은 벼농사에 적합했다. 구태여 저수지를 만들 것도 없었다. 연중 벼를 재배할 수 있었다. 쌀은 밀보다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한다. 예로부터 벵골에 사람이 많았던 까닭이다. 과연 바글바글, 득실득실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보도를 넘어 차도까지 점령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것만 같은 끝없는 人波(인파)였다. 그 사이를 뒤집고 걸어다는 것 자체가 수행이고 고행이었다. 악명 높은 자카르타와 마닐라의 교통 체증도 이미 경험해 보았지만, 다카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는 생지옥이었다. 무덤덤한 표정의 그들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방글라데시는 큰 나라이다. 국토의 3면이 인도에 둘러싸인 형세를 보거나, GDP가 낮은 형국만으로 소국인양 착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1억6000만 명, 세계 8대 인구 대국이다. 미국의 절반이고, 러시아나 일본보다도 많은 숫자이다. 그 많은 인구가 그리스만한 영토에 몰려 살아간다.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은 국가이다. 그 인구의 90% 가까이는 또 무슬림이다. 그래서 방글라데시의 무슬림이 이집트와 이란 인구의 2배에 육박한다. 인도네시아, 파키스탄을 잇는 세계 3대 이슬람 국가이다. 

벵골 만과 히말라야만 만나는 것도 아니다. 인문 지리의 만남도 남다르다. 동과 서가 여기서 만났다. 영국과 인도가 처음 만난 곳이 벵골이었다. 1757년 6월, 동인도회사가 자리를 잡았다. 이 회사를 시작으로 영국은 100년 후 남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영토와 인구로 따지자면 벵골이 영국보다 훨씬 더 크다. 그래서 아메리카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즉, 대영제국 역시 벵골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중국의 강남 지방과 더불어 아시아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대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농업 생산력이 월등한데다, 동인도와 동남아의 해상 무역망을 장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이기도 했다. 

벵골에 터를 잡은 대영제국은 점차 펀자브의 무굴제국을 잠식해갔다. 그러나 인도 아대륙에서 반복된 기왕의 제국 교체사와는 달랐다. 유라시아형 대륙 제국이 아니라 유럽형 해상 제국이었다. 

가장 큰 차이는 자본주의의 도입에 있었다. 경제 운영의 이념과 목표가 달랐다. 제국의 장기 지속이 아니라, 최단 기간 최대 수익 창출이 목적이었다. 농작물 재배부터 달라졌다. 먹고살기 위한 농업이 아니라 팔아서 이윤을 남기기 위한 상업이 되었다. 이른바 '상품 작물' 재배가 활발해졌다. '현금 작물'이라고도 했다. 현지인의 생존과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해외 시장의 소비자를 위한 생산이 본격화된 것이다. 시장 경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다.

대표적인 상품이 아편과 차였다. 벵골에서 재배한 아편은 중국에 내다팔고, 다즐링과 아삼에서 키운 차는 영국과 유럽에 수출했다. 즉, 벵골은 중국과 유럽 간의 대역전, 이른바 '대분기'와도 무관치 않은 장소였다. 벵골산 아편으로 골병이 들어간 대청제국에 결정타를 날린 이들은 펀자브 출신 용병들이었다. 

대영제국의 흉만 보는 곳은 공정하지 못하겠다. 벵골은 동방과 서방, 아시아와 유럽의 문명이 조우하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콜카타는 남아시아의 정치 중심이자 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18세기 초까지 벵골의 중심은 다카였다. 영국으로 인해 콜카타가 벵골의 제1도시로, 아니 런던 다음으로 가는 대영제국의 제2도시로 비상한 것이다.

영국은 1830년대부터 벵골에서 무굴제국의 지배 언어였던 페르시아어 사용을 폐지시켰다. 대신 영어 학교를 보급하고 영어로 가르치는 대학을 만들었다. 콜카타 대학교가 들어선 것이 1857년이다. 다카 대학교는 1921년에 세워졌다. 특히 콜카타 대학교는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다음 가는 명성을 누렸다. 여기서 소위 '벵골 엘리트'들이 양성되었다. 벵골 델타의 지주 집안 자제들이 콜카타로 몰려들었다. 학력 자본을 축적하고 교양인으로서 빅토리아풍 아비투스를 습득해갔다. 인디아 잉글리시, 힝글리시(Hindi+English)의 기원이다.

동서 문명의 융합도 일어났다. 콜카타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영어가, 힌두 문학과 영문학이 혼합되었다. '벵골 르네상스'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와 영어는 물론 벵골어와 페르시아어에 도 능통한 르네상스 인이 배출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타고르이다. 20세기 초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강력한 추천으로 일찌감치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였다. 대영제국의 문학 망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그 타고르의 할아버지가 아편 무역의 중개상이었음이 인상적이다. 할아버지는 영국-인도-중국을 잇는 물류의 개척자였고, 손자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잇는 문류의 선구자였다.

타고르는 훗날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가(國歌)가 될 노래도 지었다. 물론 조국 인도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분할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는 콜카타 대학교만으로는 족하지 못했다. 동서 문명의 융합을 사표로 삼는 산티니케탄 학교를 세운다. 훗날 국제 대학으로 발전되었다. 여기서 배출된 세계적인 경제학자가 바로 아마트리아 센이다. 센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것은 1998년이고, 타고르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1913년이다. 두 인물 모두 벵골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하지만 두 번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벵골의 지난 20세기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무리 '벵골 르네상스'라고 추켜세워도 식민지는 식민지였다. 식민지 근대성이 아무리 휘황했다 한들 식민지로서의 본질은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벵골의 고난도, 방글라데시의 비극도, 대영제국 시기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 다카 대학교 도서관. ⓒ이병한



▲ 다카의 타고르 기념관. ⓒ이병한




동벵골과 동파키스탄 

벵골 르네상스는 대영제국의 독배였다. 갈수록 벵골 엘리트 사이에서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당장 타고르부터 동으로는 일본과 중국을, 서로는 이란과 터키를 주유하며 유럽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범아시아주의의 기운을 고조시켰다. '동방의 등불'에만 기대를 걸었던 것이 아니다. 이슬람의 중흥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영국의 첫 대응은 벵골의 분할이었다. 1905년 벵골을 절반으로 갈라서 서쪽만 벵골이라 하고, 동벵골은 아삼에 갖다 부쳤다. 그리고 동벵골-아삼의 주도는 다카로 삼았다. 콜카타와 다카를 분리 지배한 것이다. 서벵골은 힌두 문화, 동벵골은 이슬람 문화라며 전형적인 분할 통치를 가동시켰다. 

그러나 자충수였다. 도리어 벵골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 콜카타에서도 다카에서도 분할 반대 열기가 고조되었다. 덩달아 '인도 민족주의'마저 강화되었다. 벵골 출신의 열혈 민족주의자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대표적이다. 콜카타의 영국 총독부가 달아오르는 벵골 민족주의에 포위된 형세였다. 

결국은 행정 수도를 옮기기로 한다. 콜카타에서 델리로 대영제국의 중심을 이동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뉴'델리 건설이 시작되었다. 점진적으로 수도 기능을 이전해서 작업을 완료한 해가 1931년이다. 그 과정에서 뉴델리에 새로 개교한 학교가 델리 대학교다. 1922년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델리에서는 양대 제국의 흔적을 모두 목도할 수 있다. (올드) 델리에는 무굴제국이, 뉴델리에는 대영제국이 자취를 남겨 놓았다. 

그러나 수도 이전이라는 특단의 대책에도 불구하고 대영제국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7년 도망치듯 인도를 떠난다. 20세기 판 '브렉시트'였다. 떳떳할 수 없는 유산도 남겼다. 영국이 떠난 남아시아는 힌두교와 이슬람으로 갈라졌다. 제국이 국가로 쪼개졌다.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되었다. 

1905년 벵골 분할 또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힌두 문화의 서벵골은 인도로 편입되었고, 무슬림이 많은 동벵골은 동파키스탄이 되었다. 벵골 영토의 64%, 인구의 65%가 파키스탄으로 편입되었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서로 1500킬로미터나 떨어진 기형적인 모양의 근대 국가였다. 그 꼴을 두고 코끼리(인도의 상징)의 양 귀에 비유하기도 했다.

작위성의 모순은 건국 직후부터 표출되었다. 영토는 서파키스탄이 훨씬 넓었지만,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더 많았다. 1951년 첫 번째 인구 통계에 따르면 7800만 파키스탄인 가운데 4400만, 약 56%가 동파키스탄에 살았다. 종교로 하나의 국가가 되었으나, 양 지역을 가른 것은 언어였다. 국어부터가 말썽이었다. 표준어 제정이 난항이었다. 국가의 중심은 펀자브에 있었고, 사용하는 사람이 많은 언어는 벵골어였다. 결국 펀자브어도 벵골어도 국어가 되지 못한다. 우르두어가 제1언어가 되었다. 페르시아어의 변종으로 이슬람에 가장 가까운 언어였다.

당장 벵골 엘리트들은 크게 반발했다. 국어 선정은 지역적 자부심, 문화적 정체성, 민주와 자치의 원리에 그치는 사안만이 아니었다. 생계 유지와 사회적 성공 여부와도 직결되었다. 벵골인들의 중앙 권력 진출을 가로막는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벵골에서 우르두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구는 3%에 불과했다. 

역사의 소산이다. 벵골은 무굴제국에는 가장 늦게 편입되고, 대영제국에는 가장 먼저 복속된 지역이다. 그래서 우르두어는 끝내 생소한 반면에, 영어가 훨씬 익숙했다. 게다가 총인구의 56%가 쓰는 벵골어를 국어로 삼자는 요구가 '민주주의'적인 측면에서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었다. 불만이 증폭되는 반면으로, 건국 열기는 차갑게 식어갔다.

펀자브인은 그들 나름으로 불만이었다. 벵골인들을 대영제국의 끄나풀이었다고 흘겨보았다. 산스크리트어와 그 파생어인 벵골어 등도 힌두 문명에 '오염'된 흔적이라고 간주했다. 잠재적인 친인도파가 될 수 있다며 꼬아본 것이다. 본인들이야말로 이슬람제국이었던 무굴제국의 정통이자 적통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페르시아 문명과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이 이슬람 국가를 표방한다면 응당 펀자브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우르두어를 국어로 삼는 것 또한 동벵골, 즉 동파키스탄을 '이슬람화'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벵골어를 지우고 우르두어로 통일함으로써 순수한 '민족 문화'를 일구어야 했다. 

펀자브와 벵골 간 뒤틀린 심사는 선거 국면에서 적나라하게 표출되었다. 1954년 최초의 총선에서 파키스탄 건국의 주역 무슬림연맹은 동파키스탄에서 참패한다. 309석 가운데 7석을 얻는데 그쳤다. 한 지붕, 딴 살림이었다. 신생 국가로서는 비상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익숙한 경로가 이어졌다. 군부가 실력 행사에 나섰다. 1958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발포한다. 군부는 입법부보다 더더욱 펀자브로 쏠린 조직이었다. 당시 장교 가운데 동파키스탄 출신의 비중은 3%에 불과했다. 벵골에서는 법률가를 양성하고, 펀자브에서는 군인들을 차출했던 대영제국의 유산이 파키스탄의 지배구조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쿠데타 이후 행정부 또한 90%가 서파키스탄인으로 채워졌다. 벵골인은 명백한 2등 국민이었다.

군사 정권은 벵골의 '지방 문화'도 탄압했다. 표적이 된 것이 타고르이다. 그의 책은 금서가 되었고, 시와 노래도 금지시켰다. 덕분에 타고르의 상징성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의 생일인 2월 21일은 '벵골 민족주의'를 표출하는 유사 독립 기념일이 되었다. 벵골어로 노래를 부르고, 벵골어로 시를 낭송하고, 벵골어로 서파키스탄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기존의 연방제 국가에 대한 성토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국가 연합 수준의 개혁을 요구했다. 국방과 외교만 중앙 정부에서 관리하고, 재정과 무역 등 내정은 모두 지방 정부로 넘기라고 했다. 화폐까지 따로 발행하는 통화 주권까지 요청했다. 

서파키스탄은 벵골인들의 이런 행태를 인도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며 몰아 붙였다. 동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자극하는 인도의 내정 간섭으로 폄하한 것이다. 마치 인도가 카슈미르의 자치 요구를 파키스탄의 내정 간섭으로 간주한 것과 판박이 논리였다. 펀자브, 카슈미르, 벵골 등 분할된 지역에서의 지방 정치가 남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작동 양상을 규정해간 것이다. 

1970년 두 번째 총선은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또 다시 표심이 완전히 갈라졌다. 동/서 파키스탄을 아우른 전국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동과 서에서 각자의 지역 정당이 압승하는 구도가 굳어졌다. 파키스탄을 국가 연합으로 재편할 것인가,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할 것인가, 중차대한 기로에 섰다. 

내전과 전쟁 

1970년 총선 당시 동파키스탄의 인구는 60% 비중으로 늘어났다. 의석수의 6할을 차지했으니 벵골인이 총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펀자브의 군인은 벵골의 민간인에게 권력을 이양할 뜻이 전혀 없었다. 

표심을 누를 수 있는 것은 물리력이었다. 동파키스탄 다카에서의 최종 협상이 결렬되고 야히아 칸(Yahya Khan)이 서파키스탄의 라호르에 도착하자, 무력 진압이 시작되었다. 벵골 민족주의를 청산하고 통일 파키스탄을 지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순식간에 야당 당사는 쑥대밭이 되었고, 다카 대학교 캠퍼스는 청년들의 무덤이 되었다. 저항하는 시민들에 대해서도 '벵골 분리주의자'라며 무차별 발포했다. 다카는 순식간에 유령 도시가 되었다. 지도부는 인도의 서벵골로 피신하여 콜카타에 망명 정부를 세웠다. 

당시 다카에 있던 미국의 영사관에서는 군인의 민간인 학살, 펀자브인의 벵골인에 대한 '인종 학살' 소식을 거듭 본국으로 타전했다. 동맹국 미국이 제공한 탱크와 전투기, 장총과 소총으로 대학살이 전개되고 있음을 시시각각 보고한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은 묵묵부답이었다. 공식적인 비판은 물론이요, 비공식적인 엄포도 없었다. 

도리어 야히아 칸을 엄호하고 사수했다. 당시 백안관의 주인은 리처드 닉슨이었고, 그의 배후에는 헨리 키신저가 있었다. 그들은 파키스탄 군부의 최고 실력자 칸을 편애했다. 주저앉힐 의사가 전혀 없었다. 미국의 방조와 묵인 속에서 20세기 최대의 비극 중에 하나로 기록될 벵골 대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 닉슨과 키신저의 머릿속은 온통 중국이었다. 원대하고 담대한 비밀 프로젝트가 가동되고 있었다. 중국과의 대화해이다. 중국과 타협함으로써만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칸이 바로 중국과의 비밀 협상 통로였던 것이다. 키신저와 저우언라이는 칸을 통하여 접촉하고 있었다. 

리얼리스트 키신저는 냉정했다. 동파키스탄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인도차이나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만큼이나 개의치 않았다. 중국과의 협상을 성공시킴으로써 국공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진 동아시아 30년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벵골인들의 죽음은 역사적 대업에 수반되는 '부수적 피해'였을 따름이다. 중국 역시도 칸을 만류하지 않았다. 평화 공존 5원칙의 첫 번째 철칙, '내정 불간섭'을 허울 좋은 구실로 삼았다.

다급해진 것은 인도였다. 난민들이 밀려들었다. 동벵골에서 서벵골로 1000만 명의 피난민이 쏟아졌다. 서벵골과 아삼 일대의 행정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서벵골은 인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곳이었다. 인도공산당의 아성이었고, 문화 대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마오주의자도 기승을 부렸다. 자칫 벵골의 동과 서가 합세하여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조속한 행동에 나서야 했다. 명분은 그럴 듯 했다. '인도주의적 개입'이다. 이웃 나라의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해서 군사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이다. 탈냉전 이후 보스니아와 르완다 등에서 일어난 사태의 전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마이클 왈저 같은 국제 정치학계의 거물도 인종 학살에 맞선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으로 1971년을 즐겨 거론한다. 가장 최근에는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드로안 대통령이 시리아 난민의 터키 유입을 막는다며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며 방글라데시 사태를 예시했다. 

결국 동/서 파키스탄 내전이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선전선동도 펼쳐졌다. 파키스탄의 실상은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펀자브 패권주의 국가'라며 동벵골인의 운명을 홀로코스트에 빗대었다. 동벵골의 민족 해방 전쟁을 인도가 돕는다는 것이다. 속내는 조금 더 복잡했다. 인도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참에 동파키스탄을 지도 위에서 지워낼 수 있었다. 양방향에서의 안보 위험을 덜어낼 수 있던 것이다. 방글라데시를 별도의 국가로 떼어냄으로써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차를 더 벌릴 수도 있었다. 

기가 막힌 것은 소련이 인도의 개입을 막후 지원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 동맹국인 파키스탄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구도는 기존의 냉전 구도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 미국은 세계 최대의 공산주의 국가 중국과 물밑 협상 중이었고,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인도의 배후에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자리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미국-중국 화해는 1972년에 이루어졌고, 소련-인도의 상호 방위 조약은 1971년에 체결되었다.

소련과 결별한 중국이 미국이 구축한 태평양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한 것은 1979년(개혁 개방)이다. 바로 그해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준 군사 동맹국 인도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1970~80년대 인도는 소련과의 협업으로 남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는 아버지의 비동맹 노선을 따를 뜻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는 파키스탄과의 두 차례 전쟁 모두 승리하지 못했고 중국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했으나, 본인은 파키스탄에 승리했을 뿐더러 아프가니스탄 점령에도 일조했던 것이다.

인도인은 그녀를 힌두교의 전쟁 여신 두르가(Durga)에 빗대었고, 영국의 시사지 <이코노미스트>는 '인도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도운 것은 인도 외교사 최대의 치욕으로 간주된다. 게다가 인도의 개혁 개방은 소련이 해체되는 1991년부터 단행되었으니, 중국과 인도 간의 12년 격차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여하튼 1971년 방글라데시를 둘러싸고 전개된 유라시아의 세력 재편은 가히 '전환 시대'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지각 변동 수준이었다. 기존의 냉전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미국, 소련, 중국, 인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들 간에 펼쳐진 냉혹한 국제 정치의 산물이었다.

혁명과 건국 

동벵골의 비극에 미국 수뇌부는 냉담했지만, 미국인마저 외면하지는 않았다. 1971년 8월 뉴욕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가 성황리에 열린다. 조리 해리슨과 밥 딜런 같은 유명한 가수들도 동참했다. 그들이 얼마나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실상을 알았는가는 미지수이다. 나의 감으로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을 것 같다. 미국 정부에 대한 반대 운동이 미국의 동맹국인 파키스탄 군부의 민간인 학살까지 옮아갔을 법하다.

실제로 1971년 방글라데시 건국에는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를 넘어서는 지구적 수준의 연동과 파장이 작동했다. 1968년, 68 혁명이 그것이다. 68 혁명이야말로 동서 냉전 구도를 교란시킨 원조였던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의 정글에 폭탄을 퍼붓고 있을 때, 소련은 체코를 점령하여 '프라하의 봄'을 진압했다. 냉전은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 공모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체제라는 비판적 인식이 분출했다. 동서 진영을 막론하고 학생들과 청년들이 냉전 체제에 순응하는 자국 정부를 향해 총궐기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파리에서, 베를린에서, 베이징에서, 도쿄에서 반란에 반란을 거듭했다. 그럼에도 기왕의 68 혁명 연구 또한 서유럽과 미국에 치중된 감이 없지 않다. 좌파들도 서구 편향적이기는 매한가지다.

당장 68 혁명은 남아시아의 파키스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니 학생들의 반란 가운데 가장 성공한 나라가 파키스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방의 68 혁명이 국가 권력의 탈환과 재편에 실패했다면, 파키스탄에서는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이라는 '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에서도 1947년 이후 대학생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68년 당시 다카 대학교의 재학생은 5만 명에 이르렀고,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만 7000명이었다. 저마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읊고, 마오쩌둥과 호치민을 읽었으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체 게바라를 흉내 냈다. 고위 공직자나 법률가가 되어 출세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공장에 위장 취업하거나 농촌으로 하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개개인은 퍽이나 진지하고 열정적이었을 것이다. 다만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지구본을 돌리며 당시를 회감하노라면 일종의 청춘 트렌드였다는 점을 부인하기도 힘들어진다. 

실제로 1968년은 파키스탄에서 TV 방송이 시작된 해이다. 1967년 말 카라치와 라호르 등 서파키스탄에 먼저 방송국이 생겼고, 1968년 초에는 다카에도 기지국이 들어섰다. 비록 국가 검열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1968년 지구촌 대학생들의 반란과 봉기가 실시간으로 전해진 것이다. 

특히나 파키스탄의 식민 모국이 영국이라는 점은 꽤나 중요했다. 전 지구적 정보망의 허브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타리크 알리(Tariq Ali)를 꼽을 수 있다. 이 이름이 익숙한 분이라면 꽤나 '진보적인' 독자라고 하겠다. 영국의 신좌파 잡지 <뉴 레프트 리뷰>를 이끈 유명한 지식인이다. 나도 20대 시절에는 그의 글을 읽으며 허영심을 채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름에 분명 '알리(علی)'가 새겨져 있음에도 그의 출신에는 미처 관심이 미치지 못했다. 그가 바로 파키스탄의 68세대였음을 이제야 의식하게 된 것이다. 이참에 뒷조사도 해보았다. 펀자브의 라호르가 고향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도련님이었다. 다만 이슬람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모 모두 공산주의자였다. '모태 좌파'였다.

소싯적부터 가정교사를 두고 영국식 교양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눈에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파키스탄 군사 정부는 '후진적'이었을 것이다. 알리는 10대 시절부터 반정부 시위에 가담했다. 아들의 장래가 걱정된 부모는 그를 옥스퍼드 대학교로 유학 보냈다. 그러나 토질이 달라진다 해서 기질마저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교내 트로츠키파의 수장이 되어 학생회장 자리까지 꿰찬다. 학생운동을 지휘하며 영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이끌었던 이도 알리였다. 

동시대 파키스탄의 대학생에게 타리크 알리는 문화적 아이콘, 시대의 영웅이었다. 1969년 그가 잠시 모국으로 귀국했을 때 공항은 알리의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적어도 파키스탄에서만큼은 동시대의 비틀즈에 못지않은 열광적인 인기를 누린 것이다. 바로 그 알리의 후예들이 동벵골의 급진적 정파를 이루었고, 대안적 정당을 만들었으며, 기어이 방글라데시라는 또 하나의 국가 권력을 창출해냈던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건국 이념은 사회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였다. 반공주의 이슬람국가 파키스탄과 결별한 것이다.

68 혁명 이후에도 미국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과점 정치가 이어졌다.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서독에서도 진보와 보수의 양당 체제가 지속되었다. 소련과 중국 및 동유럽에서는 일당 체제가 건재했으며, 일본에서도 자민당이 주도하는 1.5당 체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파키스탄에서만 68 세력이 반문화/대항 문화에 그치지 않고, 대항 권력을 창출하고 대안 권력에 도달한 것이다. 1968년에는 1958년 이래 군사 독재를 지속하던 아유브 칸 정부를 무너뜨렸고, 1971년에는 또 다른 군사 독재자 야히아 칸으로부터 방글라데시를 쟁취해냈다.

그러나 1947년에 이은 1971년의 두 번째 건국 또한 결코 수월하지가 않았다. 나라를 건사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것 이상으로 난제였다. 더군다나 두 번의 대학살과 전쟁 이후의 나라 세우기는 더더욱 힘겨운 노릇이었다. 벵골이 경험한 파란만장한 현대사 때문인지 예상보다 글이 훨씬 길어지고 있다. 1971년 이후의 방글라데시는 다음 주에 이어가기로 한다. 인구 1억 6000만 명의 대국이라면, 두 주를 할애하는 것이 마땅하고 온당한 대접인 것도 같다.


자출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9440

이병한 역사학자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